보수는 기득권을 가진 층이고, 진보는 기득권을 가지려는 층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시절에도 보수를 지지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기득권층이 아닌데,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사는 만큼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보수는 말한다. 그 ‘열심히’의 질과 층위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돼 버렸다는 것을 눈치껏 숨긴 채 ‘노력 비례 보상’이란 프레임으로 공정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속마음은 이렇다. 내가 잘난 걸 어쩌라고, 우리 집안이 부자인 걸 어쩌라고, 인간은 원래가 불평등한데 뭐 어쩌라고.
그러니 진보는 윤리 따위로 보수를 이기겠다고 착각하지 말자. 애초에 윤리는 진보의 족쇄일 뿐 보수를 반성케 한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그 잘남의 프레임을 가져와야 한다. 보수의 지질함을 지난 대선 주자들이 드러내 줌으로써 차근차근 자멸했듯이, 유능함과 경쾌함을 진보가 선점해야 한다.
진보가 똑똑한 걸 어쩌라고, 진보가 유쾌한 걸 어쩌라고, 진보하면 즐거운 걸 어쩌라고, 이런 포지션이 필요하다. 아이돌들의 칼군무를 보면 그 연습량에 감동하게 된다. 진보는 아이돌만큼 노력해서 아이돌처럼 대중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
투명하게 욕망을 드러내고 정당하게 경쟁하는 사회, 그것이 경쟁이 두려워서 뒤로 로비하고 연고주의가 무너질까 봐 실핏줄 터지게 옹호하는 기존의 보수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는 길이다. 그러니 우리 쓸데없이 선량한 척하지 말고 철저하게 욕망에 충실하자.
나는 소망한다. 코스프레가 통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진정 살아보고 싶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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