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불행하게도 일제 강점기를 빡세게 거치는 바람에 그때 한 맺힌 작품들이 많아, 근데 또 시대가 불우하면 작품은 좋은 게 많지, 거기다 근대문학 태동기다 보니 이를 중시 여기는 문학계 풍토와 맞불려 1910-1945년 사이의 작품을 소중히 여기지. 그 중에서도 40년대에는 진짜 전쟁 막바지라 작품 활동하기 힘들었거든, 인지도 좀 있다 싶으면 친일활동에 끌려 다니고, 그러다 보니 이 시기의 저항시인인 이육사를 열라 아낄 수밖에 없어, 이런 문인 없거든, 깡다구 좋은 시인 말야.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어때? 40년에 쓴 작품이라는 데, 느낌 팍 오지? 현실은 완전 시궁창이야, 오죽 하면 한 발짝 움직일 여지도 없을까, 그냥 낭떠러지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돼, 무릎 꿇을라고 해도 그 정도의 쪼매난 공간조차 없다잖아, 그러니 눈 딱 감아 버려, 왜, 내면으로 침잠해 버리게, 참 독하지? 결국 이 징글징글한 현실도 꾸역꾸역 견디다 보면 무지개, 곧 희망을 볼 수 있다고 외치는 패기 보소,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인 ‘절정’은 꼭대기가 아니라 절망의 바닥을 치면 이제 일어날 일만 남았다는 ‘각성’에 해당하는 거지. 수사법으로는 ‘역설’이라 그래, 말이 안 되잖아, 절망의 바닥에서 절정이라니, 참말로 독한 것, 그러나 이육사는 실제 역사의 인물, 주인공 버프 없이 해방 직전(1944년)에 죽는다네.
그럼, 이육사 알았으니 이번엔 윤동주 가볼까? 그도 40년대 저항시인이거든. 다만 그는 이육사처럼 직접 독립운동을 못 했어, 그래서 시마다 부끄러움이 진득진득 묻어나, 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나는 뭘 하겠다고 꾸물꾸물 공부하고 시 쓰고, 급기야 일본 유학까지 오고, 아, 씨~, 젠장 젠장 된장, 뭐 그런 심리인 거지, 그게 시로 툭 튀어나온 게 <쉽게 씌어진 시> 같은 거.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슬프지? 젊은 나이에 공부 좀 하겠다는데, 그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이리 괴로워해야 할까, 그게 시대적 운명인 거지, 동주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서(1917년) 그 역시 주인공 버프 못 받고 해방 전에 죽어, 심지어 45년 2월에, 그것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 당했다는 추측을 남기며, 그래서 그의 시는 사후에 더 애틋하게 사랑을 받는 듯.
그런데 불우한 현실은 끊어지지 않아, 그래서 60-70년대엔 김수영과 신동엽이 참여시인으로 유명하지. 김수영은 개인의 소시민적 삶과 민중의 질긴 생명력에 희망을 걸었고, 신동엽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소명에 기댔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유명시라 낯설진 않을 거야, 여기서 제목이며 중심소재인 ‘풀’이 바로 민중임, 즉 비유지, 풀처럼 별 볼일 없는 찌질한 존재지만, 그래서 힘들면 후딱 엎어져버리는 미천한 존재지만, 그래도 시련을 겪고 나면 먼저 일어난다는 그 전설의 존재, 그렇게 버티고 견디는 생명력에 경이를 표하는 거지, 왠지 잡초 같지만, 잡초도 소중한 생명이긴 하니까, 에이~ 잡초면 어때,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위로하자.
근데 김수영 시의 장점은 소시민의 쪼잔함을 다룰 때가 완전 절정이야.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한자 섞여서 읽기 어렵다고? 아는 한글만 읽어도 충분해, 중요 진술은 다 한글인데 뭐, 이 시도 꽤 유명한 거거든, 제목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고궁 하면 또 우리의 쓸쓸하고 우울했던 역사가 떠오르지? 백성들의 삶과 떨어져 있었던 지배층들, 우리 서민들의 삶은 왜 예나 지금이나 이리도 고단할까, 가진 것도 없는데 괜히 양심은 살아 있어서 쓸데없이 괴로워.
근데 이런 소시민적 삶의 괴로움을 퉁치고 스케일 크게 신동엽은 역사적 민중에 초점을 맞춰,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 이 시가 엄청 유명한 거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확실히 어조가 세지? “껍데기는 가라”고 반복해서 매정하게 외치잖아, 여기서 ‘사월’은 4·19혁명이고, ‘동학년’은 동학혁명을 의미해, 신동엽은 69년에 사망하는데 그의 시는 70년대에도 쭉 읽혀, 그래서 6-70년대 저항시인 하면 김수영과 신동엽을 꼽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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