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인간관계에 서툴고 처세도 지혜롭지 못하다. 상대가 원하는 바도 잘 모르겠고 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습성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눈치가 없다. 그래서 자료에 집착하고 대립하는 의견을 두루두루 수집하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소속감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진영논리를 자신의 사유체계로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다.
4·7 재보선 후 다시 급부상한 이슈 조국과 박원순은 자꾸 타블로와 신천지를 연상시킨다. 상대 진영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이유는 보통 둘 중의 하나다. 너무 오랫동안 나와 다른 의견을 안 들어버릇해서 아예 들리지 않거나, 아니면 행여라도 들어보면 내가 흔들릴까 두려워 자신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일부러 안 듣거나. 전자는 먹고사는 데 급급해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나고, 후자는 욕망 안에 자신의 정체성을 가두는 사람들에게 주로 나타난다.
우리는 타인과 내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상대가 나와 의견이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저 생각이 다를 뿐인데 누구는 그걸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괘씸해하고, 누구는 그걸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배신의 징후로 받아들여 의심하고, 누구는 그걸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로 받아들여 분노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위의 세 가지 증상이 동시에 발현된다. 이때 소통에 대한 희망은 동화적 판타지이므로 각자의 바벨탑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 그나마 안전하게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조국네만 특혜를 받은 게 아니다. 조국한테 와서 우리나라 입시 문제가 덜컥 걸려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난스럽게 검찰이 탈탈 터는 바람에 국민은 검찰의 표적 수사가 어떤 건지 알아버렸고, 검찰은 의도치 않게 특권층끼리의 암묵적 거래를 만천하에 드러내 버렸다. 그래서 누구는 조국네가 억울하다 하고 누구는 내로남불이라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양쪽 다 선택적 정의와 선택적 분노라고 상대를 공격한다. 이 역시 둘 다 맞는 말이다.
어쨌든 생선을 가시째 먹으려니 자꾸 목에 걸린다. 이미 조국네는 관상용 열대어가 아니다. 조국 스스로 관상용 열대어의 위치에서 내려온 이상 아이돌처럼 팬이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역할은 끝났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이상 열대어 역시 가시가 빽빽한 생선일 뿐이다. 국민의 밥상에 놓인 생선은 가시를 바르고 소비돼야 한다. 과거처럼 자신의 속살을 감추고 대중 앞에 설 수 있는 시대가 지났다. 하물며 가공된 이미지로 소비되는 아이돌마저 과거의 학폭이 발목을 잡는 시대 아닌가.
지금까지의 정황상 박원순 사건의 피해자는 대략 윤곽이 나왔다. 그녀는 박원순을 권력자로 추종했고 권위자로 존경했다. 그런 사람의 신뢰와 총애를 받는 상황이 자랑스럽고 뿌듯하기도 했다. 그러면 박시장에게 보인 그녀의 그간 행동이 설명된다. 문제는 그녀가 그렇기에 더욱 자신의 성폭행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은 박시장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거라는 거다. 그러면 도미노처럼 과거의 행위들도 다 다르게 해석된다. 나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총애한 것이 아니었네? 피해자인 내 편을 들어 줘야지, 가해자 처벌을 제대로 안 하는 이유가 뭔데? 결국 박원순 당신도 같은 남자? 이런 논리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가수 타블로의 학력 위조 의혹 소동이 졸업장 사기가 아닌 졸업 과정 사기로 진행됐다면 싸움은 다른 양상이 됐을 것이다. 한때 학력 위조가 일상이었던 우리 사회에서 타블로 대 타진요 싸움이 한낱 질투에 사로잡힌 편협한 광신도 사건으로 종료된 것은 아쉬운 측면이 있다. 물론 타진요 사건 이후 타블로는 학벌로 홍보하는 일이 없어졌다. 그러나 졸업장 위조 말고 대리학점이수 같은 졸업 과정상의 불법이나 편법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문제인지 공론화할 기회를 놓쳤고, 타진요는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시기 질투의 화신으로 상징되었다.
신천지는 인터넷상의 정보를 비진리라고 해서 신도들에게 인터넷 사용을 자제시킨다. 특히 안티신천지카페 같은 경우는 절대 들어가 보지도 말라고 한다. 비진리를 먹으면 진리에서 떨어진다고. 비진리의 독은 그 양이 아무리 적어도 물컵에 잉크 한 방울 떨어지면 그 물 전체를 못 먹게 되는 것처럼 강력하다고. 그런데 이게 신천지만의 논리일까? 나는 최근 극우 유튜브 방송을 자꾸 보면 물든다고, 그런 건 아예 접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얘길 들었다. 충격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다수의 인간을 정신적 미성년자라 생각하는 이 사고는 대체 뭘까? 몸에 나쁜 술·담배는 어른만 할 수 있다는 논리인가? 상대를 확증편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자신도 어느새 확증편향에 빠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오늘날의 국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통제된 정보에 만족하기엔 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하다. 보편성이라고 해봐야 30%을 넘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일례로 역대 드라마 시청률이 50%, 60%를 넘었다면 지금은 20%만 넘겨도 대박이다. 그만큼 지금의 우린 동시간대에 함께 존재만 할 뿐 같은 행위를 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상황이 이런데 정치라고 다를까. 그런데 유독 정치에서 진영논리를 더 강요하는 것은 그만큼 정치를 진짜 전투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이미 정치가 맹신적인 종교가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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