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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은 휘발되고 슬픔은 고이고 분노는 타오른다

아난존 2019. 12. 7. 08:30

 

 

 

 

분노조절장애가 정식병명이 아니라 해도 각종 묻지 마 범죄, 갑질, 왕따, 마녀사냥, 인종차별, 성차별, 주행 중 시비로 인한 사고 등등 온갖 혐오 현상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는 분노에 약할까, 일단 분노에 휩싸이면 합리적 사유 따위 재가 되어 날아간다. 그래서 나를 통째로 던지게 만드는 활화산 역할을 하고, 그래서 억울함을 연소해서 타오르는 분노가 때로는 정의의 초석이 되기도 한다.

 

분노의 감정도 켜켜이 세분화하면 다양하고 스펙트럼이 넓겠지만 최근 강력범죄 중 범죄 동기에, 나를 무시해서, 이 말이 자주 등장한다. 그놈의 무시가 뭐길래 살인 충동까지 느끼게 하는 걸까, 실제로 상대가 나를 무시했느냐는 중요치 않다. 진짜 무시당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무시의 경중 기준이 사람마다 다른 데다 감정에 객관적 기준이란 게 존재하지도 않고, 어차피 분노의 뇌관은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끼면 그만인 주관적 감정일 뿐이니까.

 

기쁨이란 감정은 휘발이 잘된다. 오래 남지도 않고 그 기억으로 삶을 유지하기도 힘들다. 즉 유통기간이 짧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무시당했다는 기분은 차곡차곡 쌓여 임계점에서 화르륵 불이 붙고 폭발해 버리는 걸까, 모든 감정 중 가장 유통기한이 길고 절대로 자연 휘발되지 않으며 인내의 한계치를 뇌관으로 하는 시한폭탄.

 

슬픔이란 감정은 고여서 굳어간다. 오래 남지만 감정의 결이 화석화되면서 그 농도가 점점 흐려진다. 그래서 처음 느꼈던 강렬함이 차츰차츰 잊히면서 어떤 경우는 추억이나 그리움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농도가 격해지는 분노와 대척점에 있다고 하겠다. 아주 강렬한 슬픔도 그래서 흐르지 못하고, 고여 버린 상처는 살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기쁨은 머리에 남아서 휘발되기 쉽고, 슬픔은 간장에 남아서 몸에 고이지만, 분노는 심장에서 출렁대며 혈관을 타고 세포 구석구석 퍼져버리기 때문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