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옷을 입은 무리가 지하철역과 연결된 상가 로비 구석구석에 모여 삼삼오오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들을 피해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한 무리에 다가간 자라투스트라가 물었다.
“당신들은 집시입니까?”
그들은 아무 대꾸 없이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안주는 어묵 몇 개와 어묵 국물이 다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자라투스트라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술잔을 건넸다.
“끼고 싶으면 앉으슈, 우린 다른 놈들처럼 배타적이지 않으니까…”
자라투스트라가 정중히 거절했다.
“술은 못 마십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순간 무리가 술렁거렸다. 우리가 누구냐니, 노숙자 몰라? 저 외국 놈 기자야, 뭐야?
“나는 한때 잘나가던 회사 대표였소. 다 옛날 일이지, 사람마다 사연들이 모두 달라서 그렇게 물어보면 욕먹기 딱 십상이오. 같은 과거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지, 근데 남의 과거는 알아서 뭐 하시게?”
자라투스트라에게 술을 권했던 그 남자는 유난히 백발이 풍성하고 인상도 온화해 보여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
“나는 당신들의 과거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지금의 당신이 누구냐는 겁니다.”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소리만 들렸다. 침묵을 깬 건 역시 풍성한 백발의 남자였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시오? 우린 모든 걸 잊고 싶은 사람들이고, 모두에게 잊히고 싶은 사람들이오.”
“나는 자라투스트라입니다. 초인이기도 하죠.”
뭐야, 미친놈 아냐? 여기 어디 미친놈들 한둘인가, 그들끼리 주고받는 말들이 낮게 깔리는데 그런 소리 위로 풍성한 백발이 말했다.
“당신이 초인이면 나도 초인이오.”
그러자 무리의 남자들이 나도, 나도, 저마다 왁자지껄 외쳤다. 서로를 쳐다보며 낄낄대고는 초인, 초인 좋다! 이제부터 누가 우리 이름을 물어보면 초인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런 말들이 오갔다.
자라투스트라는 갑자기 유쾌해진 그들 무리를 보면서 의문이 들어,
“당신도 나처럼 영원히 죽지 않습니까?”
하고 백발이 풍성한 남자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죽고 싶소, 영원히 죽지 않는다니 세상에 그런 천벌이 어딨소? 뭐 볼 게 있는 세상이라고…”
백발의 심드렁한 대답에 자라투스트라는 깜짝 놀랐다. 영원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원하는 존재라니, 내가 잠든 사이에 세상이 진화한 것일까?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죽어서 지옥에 가면…”
백발은 자라투스트라의 말을 끊었다.
“사는 게 지옥이오, 그리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게 우리 같은 노숙자가 아닌데 무엇이 걱정이오?”
백발의 말에 자라투스트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럼, 누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겁니까?”
“적어도 여기 있는 우린 아니오. 당신도 조심하쇼, 한국은 사기꾼 천지야, 우리라고 처음부터 노숙자였겠소? 이놈 저놈한테 당하고 나면 사는 게 지옥이란 걸 알게 되지.”
“그들과 싸워서 이기면 되지 않습니까?”
자라투스트라는 백발 남자가 진리를 깨달은 초인인지 알고 싶었다.
“나쁜 놈일수록 잘사는 세상이니 지옥이라 하지,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들이 뭘 갖고 싸운단 말이오?”
백발은 자라투스트라에게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라투스트라를 외계인 보듯이 쳐다봤다. 자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그들에게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도시의 밤은 온전히 어둡지 않다. 불빛이 별빛보다 밝고 달빛도 보이지 않는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시의 부랑자들은 지혜의 길에서 허무주의를 만났으나, 허무주의의 뿌리를 알지 못해 세상과 맞설 의지와 용기가 없다.”
도시는 아무것도 파괴하지 못한다. 자라투스트라는 동굴이 있는 산으로 돌아가려고 빠르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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