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차라투스트라, 한국에서 깨어나다

아난존 2017. 12. 10. 19:00

      


. 동굴에서 깨어난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를 깨운 건 정오의 햇빛도 한낮의 바람도 아니었다. 그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산에 오르는 중이었고 옷차림이나 신발로 보아 모두 전문가들처럼 보였다. 그들의 왁자한 소리에 동굴 밖으로 나온 차라투스트라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대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몰골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자신들의 가방에서 주섬주섬 빵이며 사과며 물 등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바쁜 듯이 우르르 몰려가던 길을 가고자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당황했다.

여긴 어디인가? 그대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내더니 급한 듯 산 위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차라투스트라는 산에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어디인가, 사람들이 하강도 상승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자신의 집 앞마당을 거니는 것같이 거침이 없구나, 여긴 거인들의 나라인가!”

차라투스트라는 등산객이 준 음식들을 먹으며 산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산 정상에 올라 바다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산봉우리를 뒤덮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질려 하강을 선택했다.

나의 독수리와 뱀은 어디에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큰소리로 자신의 동물들을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입구에 이르자 차라투스트라는 낯익은 건물을 보았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교회 건물이었다. 교회 안마당에는 아기천사의 동상이 있었고, 글자가 가득 적힌 큰 기념비 같은 것도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교회 안마당을 지나 예배실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실 안에는 나이든 여자가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대는 기도하는 것인가?”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차라투스트라에게 전혀 놀라운 기색이 없었다.

그대는 무엇을 기도했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길을 잃었나요?”

나이든 여자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되물었다.

나는 긴 시간 잠을 잤소.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으나 내게 그건 중요치 않소. 차라투스트라가 있는 곳이 새로운 세계의 중심이오.”

차라투스트라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당신은 오래 전에 길을 잃었군요. 괜찮아요, 신은 당신에게 새 길을 열어주셨어요.”

차라투스트라는 그녀의 침착함과 대담함에 놀랐다. 대체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이 세계에 일어났던 것인가!

그대는 나를 아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그녀가 신과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오직 신만이 당신을 아세요. 나는 신께서 보여주시면 알 뿐 내 스스로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고는 눈빛을 번득이며 차라투스트라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차라투스트라는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신은 이곳에서 다시 살아났는가, 그런데 신은 차라투스트라가 잠을 자는 동안 전투력을 키운 것인가, 그녀는 전의(戰意)로 넘치도록 충전된 배터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화한 것처럼 보였다.

차라투스트라는 도시로 나가고 싶어졌다.

산은 이제 거인들의 세상이다. 그 거인들에게는 남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기 좋아하고, 자신들의 말만 하면서 눈빛을 번득이고, 몸짓이 재며 남녀 구분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 도시를 떠도는 좀비들

 

차라투스트라는 도시에 내려와 사람들을 보고는 경악했다. 도시인들은 표정이 없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녔는데, 그들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고 어디를 보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인형처럼 보이기도 했고, 짐승이 인간의 형상으로 진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잠든 그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인류는 종말이라도 맞았던 것인가, 그래서 새로운 인종이 도시를 장악한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그들 중 한 무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그 무리는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동작은 미리 연습이나 한 듯이 일정하게 움직였다.

그들 중 여자 두 명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동시에 말했다.

우린 이 거리의 지배자들이에요.”

그녀들은 합창하듯 높은 소리로 대답했다.

지배자? 그대들은 무엇을 지배하오?”

차라투스트라가 다시 그들 무리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당신을 지배하오.”

그들 중 남자 두 명이 차라투스트라에게 합창하듯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나를 지배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린 이 거리의 지배자로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배해요.”

그들 중 여자 두 명이 높은 소리로 합창하듯 차라투스트라에게 동시에 대답했다.

어떻게 지배한다는 거지?”

차라투스트라는 여전히 그들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린 당신을 지배하지, 어떻게 지배하지는 않아.”

그들 중 남자 두 명이 낮은 소리로 합창하듯 차라투스트라에게 동시에 대답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서둘러 이곳을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주변을 에워쌌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우리는 당신을 지배해! 당신은 이제 우리와 같이 다녀! 우리는 당신을 지배해! 당신은 우리와 같이 다녀야 해!”

그들은 차라투스트라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큰소리로 합창하듯 소리쳤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둘러싼 무리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들 무리는 차라투스트라를 잡으려고 움직였지만, 그 움직임이 지나치게 느려서 정말 차라투스트라를 잡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해! 내가 알던 인류는 멸종했어. 저들은 내가 알던 인류가 아니야! 인간을 찾아야 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지하에 사는 노인


차라투스트라는 몹시 피곤했다. 그는 물을 마시고자 주변을 둘러봤다. 해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이라 황혼의 붉은 빛들이 도시의 건물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쉬고 싶었다. 그는 도시의 골목길로 들어갔다. 크고 높은 담장들과 닫힌 문들이 보였다. 그 안에 과연 사람들이 살고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골목 안은 고요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난감했다. 닫힌 문들은 절대 열릴 것 같지 않았다.

그때 한 노인이 골목길에 나타났다. 차라투스트라는 반가웠다.

그대는 어디 가는가?”

차라투스트라가 노인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걸 보니 당신은 이 도시 사람이 아니군.”

노인은 차라투스트라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오늘 이곳에 처음 왔소.”

차라투스트라가 노인에게 말했다.

이 도시에서 쉴 곳을 찾고 있소.”

노인이 응대가 없자 차라투스트라는 재차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이 도시에서 여행객이 쉴 곳은 없소.”

노인은 이렇게 말한 후 차라투스트라를 지나쳐 가려고 했다.

이 도시에서 나가고 싶소. 어디로 가야 하오?”

차라투스트라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그를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차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의 도시에서 길을 잃었군.”

이 말에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것에 반갑고 놀라워 노인에게 물었다.

나를 아시오?”

당신이 차라투스트라라면 이 도시에서 길을 잃는 것이 당연해.”

노인은 그렇게 말한 후 다시 침묵에 잠겼다. 둘 사이의 정적이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에 길고 딱딱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노인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면 내가 재워주겠소.”

차라투스트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산은 거인들에게 점령당했고, 도시는 좀비의 무리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방인이 쉴 곳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이 도시의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고, 이 도시 밖의 세상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고맙소.”

차라투스트라는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골목길을 도니 세 개의 골목이 보였다. 이런 큰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동네였다. 노인과 차라투스트라는 세 개의 골목 중 오른쪽 길로 들어섰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걸은 후에야 노인의 거처에 도착했다. 사람 하나 통과할 만한 철문을 여니 계단이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하에 있는 노인의 거처는 밖에서 상상한 것 같지 않게 크고 깨끗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거실에는 어울리지 않게 밝고 화려한 케텐이 드리워져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노인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수행자인가, 사제인가, 학자인가, , 학자는 아닐 수도 있겠다! 그의 거처에는 책이 단 한 권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 도시에 없는 사람이오.”

노인이 먼저 수수께끼 같은 말을 차라투스트라에게 던졌다.

그럼 나는 이 도시에 있는 사람인가?”

차라투스트라가 노인에게 되물었다.

당신이 차라투스트라라면 당신은 있는 사람이오,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있으니. 당신이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면 당신은 있는 사람이오, 내가 당신과 대화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그대도 있는 사람 아닌가? 내가 당신과 대화하고 있으니.”

차라투스트라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내일도 있을 것이지만 나는 내일 없을 것이오.”

노인은 그렇게 말한 후 자신의 방으로 자러 들어갔다.

혼자 거실에 남게 된 차라투스트라는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동굴에서 깨어났다. 긴 시간 잠이 들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잠들었던 사이에 세상은 변해 있었다. 산은 사람들로 들끓었고 도시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산을 가득 메운 거인들이나 도시를 무리지어 떠도는 좀비들이나 다른 사람의 말은 귀에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목적 없이 바쁜 그들, 그들은 드디어 스스로 신이 된 것인가!

그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눈 노인은 이 도시에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노인이 잠든 방의 문을 열어볼까 망설였다. 그러나 열지 못했다. 그리고 그도 곧 잠이 들었다.


. 어둠, 무덤 그리고 통로


이곳은 무덤처럼 고요하고 어둡다. 차라투스트라는 빛이 없는 곳에서는 소리가 빛을 대신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움직임이 내는 소리에 의지해 거실의 불을 밝히고자 거실 벽을 더듬고 다녔다. 그러다가 노인이 있는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는 방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윤곽이라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착오였다. 이곳은 말 그대로 거대한 무덤일지도 몰랐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내는 소리에 의지해서 방안의 벽들을 두 손으로 더듬었다. 무언가 손에 걸리지 않을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환해진 방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마침내 눈이 밝음에 적응됐을 때 그는 보았다, 이 방은 육면체 전체가 수십 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 이 문들 중 하나로 노인이 나갔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문 하나를 밀어 보았다. 열리지 않았다. 열쇠도, 문고리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약간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이 문 너머에 그가 영원을 걸고 찾아 헤맨 세계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생각은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는 서둘러 이 문 저 문을 있는 힘껏 밀어 보았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그 문들은 너무 단단해서 부순다고 부서질 것 같지도 않았다. 노인은 분명 이 문들 중 하나로 나갔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방안을 찬찬히 살폈다. 천장에 있는 문들이 잘 열릴 것 같았다. 아니, 그 문들 외에는 다 열어 보았으나 모두 열리지 않았다. 방바닥의 문들도 마찬가지였다. 틈새 하나 없는 문들을 발로 쾅쾅 차보았으나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문들은 벽에 그려진 그림처럼 보였다. 사실, 문고리가 없는 문들이란 벽과 차이가 없었다.

이제 그는 천천히 천장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방안은 무중력 상태처럼 그의 몸을 받아 주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두 무릎과 두 손바닥으로 기어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천장에서 이 문 저 문으로 옮겨 다니며 문을 몸으로 밀던 차라투스트라는 구석에 위치한 문과 문 사이에 새끼손가락만이 들어갈 정도의 틈새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 사이를 비집고 손을 넣어 문을 양쪽으로 밀었다. 그 문은 여닫이가 아니라 미닫이였다. 그의 몸은 열린 문 사이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미끄러지듯 길고 어두운 홈통 같은 터널을 통과했다.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을 알 수 없는 곳에서는 빛이 시간을 대신하고, 빛이 없는 곳에서는 소리가 빛을 대신한다.

차라투스트라는 터널 속에서 의식을 잃었다.

 

. 빛이 끝난 곳의 사람들 

  

당신이라면 이곳에 올 줄 알았소.”

노인은 침대에 누워 있는 차라투스트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를 아는 그대는 누구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노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소.”

노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람이 곧 세상이다. 나는 사람에 대해 말했고, 그것이 곧 세상에 대한 얘기다.”

차라투스트라는 항변하듯 노인에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오. 빛이 영원할 거란 당신의 믿음은 틀렸소.”

노인의 표정은 어두웠고 목소리는 힐난조였다.

이곳은 나의 왕국이 아니다. 나의 왕국에서는 빛이 영원하다.”

차라투스트라는 노인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소. 그런데 당신이 현재 머물고 있는 이곳도 당신의 왕국이 아니라면, 대체 그 왕국은 어디에 있는 것이오?”

차라투스트라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안하다. 나는 인간을 잘 알지 못했다.”

차라투스트라가 노인에게 사과했다.

그럼 이곳은 나의 왕국이 아닌가? 그대들은 나의 백성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여긴 어디인가?”

차라투스트라가 노인에게 물었다.

여기는 빛이 끝난 곳이오. 이곳에는 빛의 죽음을 본 사람들이 모여 있소. 그들은 도시에 집이 있지만 그곳에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오.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도시인이 될 수 없지.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그게 도시인의 자질이거든.”

노인이 차라투스트라에게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이제 세상은 소인의 덕마저도 사라졌단 말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 덕이라고? 그 말은 사라진지 오래 됐소. 이제 그런 고대어는 더 이상 쓰지 않는다오. 세상은 두 종류의 인간만을 원하지. 날마다 산을 오르는 거인족, 도시를 떼 지어 다니는 좀비족, 그들만이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지.”

그대들은 다르지 않나? 그렇다면 나의 왕국은 실패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빛이 죽는 것을 보았소. 우리에게는 도시를 파괴할 방법이 없소.”

선악은 어찌 되었는가?”

선악이라고? 그거야말로 고대어가 아니오? 이제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은 없소.”

드디어 그대들이 선악을 극복했는가?”

극복이라고? 그 말도 사용 안 한지 오래 됐소.”

차라투스트라는 노인의 말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대들은 대체 무엇을 지켰는가? 이제 남은 것이 뭐란 말인가?”

차라투스트라여, 그대가 지킴을 말하는 것은 우습다.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게 당신의 뜻 아니었나? 남은 것이라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게 당신의 교리 아니었나?”

노인은 차라투스트라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대들은 나를 오해했다. 나는 오독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절규했다. 나는 인간을 너무 몰랐다. 나는 인간이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줄 몰랐다. 나는 인간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이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나는 읽히지 않는 책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차라투스트라여, 괴로워 말라. 우리가 당신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오. 차라투스트라여, 당신 탓도 아니지만 우리 탓도 아니오. 당신은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 있구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지구는 둥글고 누구도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없소. 당신이 인간을 오독했다고 자책도 하지 마시오. 지금의 인류는 아무것도 읽지 않소. 듣지 않고 읽지 않으니 오판도 오독도 없소. 그러니 오독의 능력을 탓하지 마시오. 오독은 당신의 자질이 뛰어남을 드러내는 것일 뿐 결코 오류가 아니오.”

노인의 위로가 차라투스트라의 머릿속을 바람 부는 모래사막처럼 덮어 버렸다.

혼자 있고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노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 나는 네모난 바퀴였다 

     

이곳은 태양이 없으니 빛이 없다. 이곳은 빛이 없으니 달이 있는지 알 수 없고, 그러니 이곳에서는 달이 있어도 없어도 누구도 상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절망감을 느꼈다. , 이리 되었는가, 빛이 없는 곳은 낮과 밤도 없으며 정오도 없다. 대체, 이 세계는 왜 이 지경인데도 끝나지 않는가, 영원은 길을 잃었고 회귀는 돌아갈 지점이 없는데, , 이 세계는 파괴되지 않는가. 빛이 끝난 곳에서도 사람들은 인공의 빛 아래 모여 살고 있다. ?

나는 종말을 본 것이다. 나는 종말을 확인하기 위해 긴 잠에서 깨어났던가, 아마도 신은 나를 자신의 마지막 남은 힘으로 간신히 일으켰으리라. 수다를 떨며 왁자하게 놀던 신들은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죽인 신은 이제 더 이상 인간들에게 관심이 없어져서 스스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남았다. 나는 죽을 수도 없는 존재였던가?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동굴로 돌아가 잠들고 싶었다. 그는 노인에게 이곳에서 나갈 길을 묻고자 자신이 있던 방문을 열었다. 암흑……,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있던 방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어릿어릿하게 앞을 비추었지만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았다. 바로 앞의 공간이 길인지 절벽인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인은? 그 노인은 어떻게 이 방에서 나갈 수 있었는가? 여기엔 분명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했는데 그들은? 그들은 무슨 방도로 움직이고 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심연의 바닥, 아니 심연 밑의 바닥에 있다!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모든 회귀의 도추에 있는 것인가? 나는 마침내 도달한 것인가? 빛이 없으니 영원임을 아는 경지, 나는 드디어 그 지점에 와 있는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내가 이 방을 나가려면 내 스스로 빛이 되어야 한다. 내가 빛이 되면 태양과 정오와 그림자가 모두 하나가 된다! 나는 원한다, 내가 모든 것이 되기를. 나는 원한다, 내가 모든 이의 기억에서 사라지기를! 그래서 나 차라투스트라가 비로소 모든 것과 하나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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