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돈 없을 권리, 가난할 자유

아난존 2018. 8. 17. 21:23




가난은 불편하다, 사고의 자유를 제약받는다.

가난해서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도, 상대가 가난을 문제 삼을 때가 있다.

 

나는 돈을 잃고 공부를 시작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만학도로 돈만 쓰는 길을 택했다.

그러기를 5, 어느새 나는 돈 안 버는 백수에 안착했다.

 

그래서인지 왕왕 오해받는 경우가 있다.

 

실외기 때문에 에어컨 사는 걸 망설이다 에어컨 살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 올해 114년 만의 폭염을 선풍기로 나게 되었다.

내 딴에는 실외기의 이기성이 불편해서 망설인 건데, 나는 후배에게 적은 돈 아끼려다 큰 돈 든다고, 나중에 큰일 생긴다고, 생각지도 못한 훈계를 들었다.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그렇게 보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돈을 아끼려고 에어컨을 안 사고 버티다 쓸데없이 생고생하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사실 우리 집은 구조상 그렇게 못 견디게 더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후의 이야기는 다 변명처럼 들린다.

그러면 나처럼 인내심 없는 인간은,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지, 내가 어떻게 타인을 설득하겠어, 하는 심리적 거리 두기 모드에 불이 들어온다.

이후의 대화는 의무 방어전이 되고 만다.

 

한 달 전쯤, 이와 유사한 일이 또 있었다.

그분이 돈 걱정을 너무 많이 하시길래, 사실 그분은 돈 걱정할 상황이 아닌데, 내 기준에서 보면 충분히 노후도 보장된 형편인데, 그래서 돈 있다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아니더라, 나는 돈을 잘 벌었을 때 오히려 공부할 생각 못 했다, 혼자 큰 집에서 살면 뭐하냐 사고가 자유롭지 못했는데, 하는 얘기를 하려다가 대화 초반부에서 바로, 과거 생각하지 말고 현재 열심히 살란 얘길 들었다, 측은한 눈빛과 함께, 이건 또 뭐지?

 

가난은 상대에게 선입견을 주는 것 같다.

저 사람은 가난하니 돈 때문에 고통받을 거야, 그러니 돈 얘기를 하면 공감대가 형성되겠지, 그래서인지 상대가 가난해도 돈 걱정을 안 하면 무척 불편해한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돈 없어서 여행 못 가, 돈 없어서 집에만 있어, 같은 이야기를 영혼 없이 하게 되었다.

그것이 구구절절 설명 필요 없이 상대와 안전하게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길이다.

고통을 나누는 게 이기심의 발로라 한들 이제는 그런 걸로 실망할 만큼 나는 젊지 않다.

 

그러나 사유의 막다른 골목에서 자꾸 치켜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우리에겐 돈 없을 권리는 없나?

가난해도 좋을 자유 따위는 애초에 없는 것인가, 하는.

 

사실 원하는 건 이거지, 돈이 우리의 사고를 좌우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는 거, 돈으로 상대의 인격을 달아보지 않는 거, 각자 자기 목은 축일 만큼의 돈이 마을의 우물로 존재하는 거, 사실은 그거다.

   

그래야 우리가 좀 더 자유롭게 사고하고, 마음껏 가난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