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지옥’, 선악은 누가 정하나?
드라마 ‘지옥’에서 감독은 새 진리회 1대 의장의 입을 빌려 묻는다.
“공포 말고 사람을 정의롭게 할 수 있는 다른 뭐가 있습니까?”
연상호 감독은 영화 ‘부산행’에서도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보통 사람들의 이기주의가 서로를 죽게 하지 않나요?”
30년 넘게 이 화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로선, 그래서 드라마 ‘지옥’이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나를 괴롭히는 인간 혐오주의는 대놓고 나쁜 놈, 그냥 DNA가 사탄의 피인 악당들 때문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연민 유전자가 부재한다는 그런 놈들이야 뭐 어쩔 것인가. 그렇게 태어난 게 자신의 선택적 의지가 아니라니까 살면서 만나게 되면 피하고 조심할밖에.
그런데 다수를 차지하는 소위 보통 사람들, 그들과는 싸울 명분도 매력도 없다. 왕따를 방조하는 조직엔 침묵하는 다수가 있고, 부조리한 수장 밑엔 자기 한 몸만 챙기는 구성원이 조직의 주류가 된다. 너라고 별 수 있어?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이기주의를 합리화하며 혹시라도 자신들의 울타리가 무너질까 울타리 밖을 경계하고 배척한다. 예수가 달리 죽었나? 당대 주류들과 각 세우다 미움받았고, 그들의 선동에 대중이 휘둘리며 죽음에 이르렀는걸.
그래서 나온 예수의 마지막 탄식,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눈이 한 개인 나라에선 두 개의 눈을 가진 사람이 이방인인 것처럼 다수는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된다. 그렇기에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수를 포기하지 못한다. 민주주의가 툭하면 구멍 나고 비 새는 허술한 제도라 해도, 그래도 현재 다른 대안이 없다면 최선의 제도인 것만은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공포 말고 사람을 정의롭게 할 수 있는 다른 뭐가 있습니까?”
오늘날 개인의 자율성은 눈치껏 악해질 권리, 맘껏 탐욕스러울 자유를 보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나만 그런 권리와 자유를 보장받은 게 아니다 보니 그게 서로 충돌하면서 위법의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다. 동일한 조건과 규정으로 경쟁하면 그만큼 힘도 들고 성과도 덜 나기 때문에, 그래서 불법, 탈법, 편법이 일상화되고 출세한 사람일수록 털면 나오는 먼지가 그냥 일상의 먼지 수준이 아니다. 그러니까 비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특혜를 누리는 사람이란 의미고 비리에 열려 있는 특권층이란 얘기다. 아, 이런! 말세, 그렇다! 종말이다!!
정말 종말? 응, 정말 종말! 아하, 그렇다면 이런 시시한 글 따위 뭐하러… 개나 줘버려! 아니, 그건 아니지, 종말은 엔딩이 아니잖아? 새로운 시작이지! 그렇다!!
그럼 이제 종말 이후의 세상을 꿈꿔도 될까?
아마도? 그렇겠지? 내일의 창조를 위해 오늘의 파괴에 슬쩍 동참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