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 마우스 vs 가로세로연구소 vs 나꼼수

대안매체의 좋은 점, 일단은 진입 문턱이 낮고, 이단은 내용이 소박하며, 삼단은 진실 대비 진정성의 가성비가 탁월하다. 누구나 자기 콘텐츠만 있으면 방송개설이 가능하고 구독자 수가 곧 권위이며 조회 수가 바로 수입이다. 얼마나 쌈박한가, 대중의 지지와 호응으로 인지도가 결정된다니 이거야말로 민주주의의 성과요 업적이다. 그래서 팟캐스트의 세계는 자유하고 유튜버의 세상은 경이롭다. 별별 게 다 있구나 싶은.
그래서겠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래도 놀랍지 않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데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높은 곳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니. 그래서 즐겁지 아니한가, 나를 ‘나’라고 말해도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물론 전파력이나 영향력 역시 당사자 개인의 몫이니 그건 알아서들 할 일이고.
나꼼수를 통해 팟캐스트를 처음 접한 나는 대안매체에 대한 선호도가 아주 높다. 믿을 수 없는 언론에 대해,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기득권 카르텔에 대해 그 답답함을 해소해주었던 것만으로 충분히 통쾌했고 마땅히 새로웠다. 최근 나꼼수 분열이 보도되고 있지만 그들은 원래 친목 모임도 아니었고, 각자 자신의 필요에 의해 뭉쳤던 관계인 만큼 그들의 현재 상황을 비난하고 싶진 않다. 변해야 할 때 변하고, 변하지 않아야 할 때 변하지 않는다면, 물론 그보다 좋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맘대로 되는 일인가.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들에게 까방권을 줘야 하네, 마네 같은 팬심의 마음은 팬들 개별이 알아서들 하면 된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서 그때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지금 맛없어졌다 해도 과거의 그 맛을 폄훼할 이유는 없다. 지금의 내 입맛이 변한 것일 수도 있고, 과거 추억의 음식이 지금은 뒤떨어진 것일 수도 있고, 음식 자체가 맛이 변질된 것일 수도 있고, 여전히 추억의 맛이 좋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입장 차가 다툴 일은 아니다. 각자 좋을 대로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지금의 대안매체는 유튜브가 대세다. 슈퍼챗이 팡팡 터지기로 유명한 가세연부터 가짜뉴스 척결을 외치며 등장한 헬 마우스까지 그들의 시장은 불특정 다수에게 열려 있어도 실상은 특정 정당의 지지자들이다. 또는 지지하는 정당은 때때로 바뀔 수 있어도, 지지하지 않는 정당은 절대 바뀌지 않는 성향의 구독자들이다. 넌 누구 편이냐, 이 물음에 즉각 대답하지 못하면 고립되는 현실에서, 글쎄, 진영논리가 없었던 세상이 인간계에 존재하긴 했을까, 확증편향 운운해봤자 내 귀에 캔디만 소리로 인식될 뿐 나머진 소음인 걸 어쩌랴.
더구나 가짜뉴스 생산에 정교함은 되려 방해가 된다. 사람들 사이를 떠돌며 상상력을 자극하려면 그럴듯하나 출처가 애매하고, 구전되기 쉬운 서사구조에, 기억에 남는 강렬한 용어 몇 개면 충분하다. 부분 진실로 전체를 왜곡하는 의도의 마법과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변신시키는 치환술로 특정 대중이 믿고 싶어 하는 정보를 가공해서 던지면 최선이다. 꼼꼼한 사실 확인이나 정치적 중립이 구독자를 늘리지도, 슈퍼챗을 보장하지도 않으니까. 물론 가세연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있긴 하다.
반면 유튜브 헬 마우스는 가짜뉴스 후두려 패기가 목적인 만큼 팩트체크가 방송 내용의 핵심이므로 콘텐츠가 참 고단하다. 상대는 기관총으로 맞을 놈 맞고 피할 놈 피해라 하는 식으로 공격을 해대는데, 헬 마우스 팀은 그런 무차별적 공격에 맞서 권총으로 하나하나 방어를 하는 구조인 탓에, 태생적으로 수고로움이 몇 배 몇십 배 가중된다. 더하여 목표를 정조준하고 사격하다 보니 대상이 되는 특정 개인에게 원한을 살 위험도 도사린다.
그런데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놈 없는 게 세상사다. 거기에 우린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도록 권장된 사회다. 누군들 까자고 덤비면 속수무책 넘어지는 게 작금의 우리 현실이다. 없어서 비리를 못 저지를 뿐 할 수만 있다면,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기만 한다면, 앞다퉈 비리를 능력으로 둔갑시켜 왔는데 이제 와서 근절하자니 어렵고 괴롭다. 기득권층의 단결이 공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걸리면 다 걸리는 사회, 소소하게라도 비리에 가담하지 않거나 협력하지 않고 살기 거의 불가능한 사회, 적어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리를 방치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갖고 있는 원죄의 사회, 그런 사회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공정을 말하니, 너나 나나 할것없이 걸려 넘어지고 난리 난리 개난리 아우성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패러다임이 전환되면 그래도 우리 사회는 달라지겠지만, 왜 나만 갖고 그러냐는 불만을 수용하는 순간 미래는 과거로 회귀할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달라지지 않으면 이제 우리는 언제 또 달라질 기회를 잡을지 알 수 없다. 이웃 나라를 보라, 한 번 잃은 기회는 좀처럼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진영논리 내려놓고 싹 다 까보자. 재수 없어 걸렸다 생각들 마시라. 역사의 패러다임을 위한 동력이 됐다고 생각하시라. 나꼼수의 이명박 까기가 역사 밀어 올리기의 추진력이 됐던 것처럼 가세연의 진보 까기도 성역을 부수는 효과가 있다. 부작용과 반작용이 그래도 비판과 불만이 없는 정적인 사회보다 낫지 않은가. 그리고 헬 마우스의 팩트체크 같은 방송들이 자발적으로 감시해주는 한 뉴미디어의 자정작용도 믿고 지켜볼 만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