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두려운 늙음
가진 게 많지 않아서 그런지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엔 종종 사로잡힌다. 지천명의 나이를 지나면서는 그게 더 심해지더니 늙기 전에 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곤 한다.
그러면 대체 난 왜 이렇게까지 늙음이 두려운 걸까? 나이가 든다는 건 경험치가 쌓인다는 거니 그만큼 득템거리도 많아야 이치에 맞다. 당연히 삶이 더 다채롭고 지혜로우니 그만큼 풍요로워야 하는데 불행히도 나는 그런 어르신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 역시 제대로 잘 늙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라고 오류 많은 과거에 대한 후회로 무기력해지지 않을 자존감이, 나라고 애써 버텨온 삶에 대한 상실감으로 심술궂어지지 않을 자신이, 또는 나라고 노인을 바라보는 주변의 고정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을지, 그런 생각들이 늙기도 전에 늙음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나이 들면 애가 된단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나이 들어도 성숙해지지 않는 어른이 많다 보니 그리고 그런 어른이 어르신이 되다 보니 나온 말일 뿐, 나이 들면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책임지는 어른이 돼야 하는 거고 그런 어른이 어르신으로 진화해야 순리에 맞는 거다.
철들면 죽는단다. 마찬가지로 어불성설이다. 가정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어른이 사회에서도 존중받기 어려운 어르신이 되는 현실에서 생긴 말일 뿐, 젊음과 유쾌함의 대척점에 철듦과 무거움을 배치하는 것, 그것의 태반은 객기와 치기에 대한 포장 아닌가. 철들어야 비로소 젊음이 상처받지 않고 가벼이 유쾌할 수 있다.
인정하는 게 그나마 정직한 일이다. 철드는 것도 성숙해지는 것도 웬만해선 해내기 어렵다고,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는데 그 노력이란 게 무진장 어려운 거라고, 한국인으로 태어나 밤새 일하거나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그 노력만을 노력이라고 권장 받아온 탓에 자기 성찰의 노력은 할 줄 모른다고.
왜 꼰대가 되는가? 나이가 열어주는 시간만큼 보고 듣지 못하니 사유가 멈춰버린다. 그러니까 꼰대는 자신의 나이만큼 시간을 살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나이 들수록 고집이 세지고 불통이 되는 것도 나이와 함께 경험을 쌓고 그 순간마다 업그레이드가 돼야 하는데 그게 진짜 힘들기 때문이다.
나라고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을까, 문득문득 그런 생각에 두려워질 때가 있다. 역할극을 수행하는 인형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나를 고유한 한 사람으로 성장시키고 있는지 도통 자신이 없기에 때때로 죽음보다 늙음이 오싹하게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