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으로 산다는 것

진영논리, 삶이 전쟁이라면 우린 생존을 위해 어느 진영이든 택할 수밖에 없다. 전쟁 중에 경계지역에 서 있으면 양쪽에서 날아오는 포탄에 맞아 죽기 딱 좋다. 그러니까 내 편만 옳다는 진영논리, 이건 결국 진영의 보호 아래 있어야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전략적 사고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게 맞는 말이 되려면 먼저 처음 전제인 삶이 전쟁이란 명제에 동의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진영논리에 갇혀 있다. 그런데 진영논리란 게 인간들을 꽁꽁 가둘 만큼 그렇게 논리적으로 견고하거나 섬세한 사유 형태가 아니다. 그보단 종교처럼 맹목적이고 신앙처럼 절대적이다. 즉 사유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란 얘기다. 그래서 작은 흠도 용납지 못해 인지 부조화로 완결해야 안심된다. 우리 편은 절대 그럴 리 없어! 신이 불완전할 리 없어, 뭐가 다른가?
전쟁에서 이편도 저편도 아니면 죽거나 난민이 되거나 둘 중 하나다. 그것도 적에게 죽는 게 아니라, 애초에 적이 없으므로 적에게 죽을 수 없다, 적이라고 오해받아 죽는다. 용케 살아있다 해도 천덕꾸러기 난민이 되어 어딜 가도 2등 국민의 지위에 만족해야 한다. 하찮게 죽고 싶지 않은 건 인간의 본능이고, 2등 국민이 되고 싶지 않은 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니 어쩌랴, 진영을 택할밖에.
그런데 우린 진짜 동의하는 걸까? 현재 우리의 삶이 전쟁이란 명제 말이다. 이따위 것을 대전제로 삼고 살아야 하는 게 정말 인간다운 삶일까? 부정하고 싶다, 마음으론. 그러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약육강식의 살육 현장을 역사라고 배우며 우린 꽤 이런 극악무도한 세계에 잘 적응해오지 않았던가? 약한 것들이 도태되는 걸 현실에서 목격하며.
이렇게 뻔한 세상에서, 이렇게 투명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왜, 여전히 정신 나간 사람처럼 경계인을 고집하는 걸까? 견딜 수 없는 게 없다는 걸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나이를 주워 먹고 왜, 여전히 모르는 척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경계인을 고수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고, 이렇게 위로하는 이것은 인지 부조화가 아니라고 나는 내게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