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릴라(데릴라), 신전 창녀 또는 여사제?
판관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인 삼손은 이방인 여성 들릴라의 계략에 빠져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 들릴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을 배신한 사악한 여인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 판관기 16장 23절에 보면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자기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물을 바치면서”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들릴라가 속한 필리스티아인들은 다곤 신을 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역시 다곤 신에 대한 믿음이 돈독하여 삼손을 들릴라의 계략으로 사로잡은 후 “우리의 원수 삼손을 우리의 신께서 우리 손에 넘겨주셨네.”(판관 16,23)라며 다곤 신을 찬양한다.
이철호의 논문 「나지르인 대 성전 창녀」(『밀턴과 근세영문학』18(2), 한국밀턴과 근세영문학회, 2008)에 의하면, 가나안 종교와 혼합된 셈계의 신 다곤은 가나안 지역의 토착민들이 전통적으로 숭배한 바알의 아버지이다. 그들은 비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흙과 합쳐지면 놀랍고 신비한 요소로 작용하여 각종 과실과 곡식들을 맺게 한다고 믿었다.
또 그들은 비가 내리는 이유를 남신들과 여신들이 성적(性的)으로 결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뭄이나 기근이 들면 신들을 자극하여 성적 결합을 하도록 유도한다. 인신공양을 행한 바알 신 제사장들이 피와 물(비)의 유사성에 착안한 공감 주술로 자기 몸에 칼로 상처를 내어 피를 흘렸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기우제 성격을 띤 이런 성적 의식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 모든 창조물이 사멸하게 된다고 확신했다. 즉, 바알과 다곤을 신으로 숭배하는 곳에서는 신성한 종교적 매춘행위가 성행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성행위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 내지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행위에서 윤리적 기준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들릴라가 신전 창녀였다면 자신의 민족을 위해 삼손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이때 들릴라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아내의 덕성이 아니라 전사의 덕성이다. 이를 근거하는 구절이 판관기 16장 5절에 나온다.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그 여자에게 올라가서 말하였다. “삼손을 구슬러 그의 그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잡아 묶어서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아내어라. 그러면 우리가 저마다 너에게 은 천백 세켈씩 주겠다.”
이처럼 들릴라는 필리스티아 제후들을 직접 상대하는 여성이다. 더욱이 그녀는 계속된 실패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며, 성공에 대해서만 막대한 상금을 받는다. 이는 그녀의 신분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므로 들릴라가 신전 창녀였다면 상당히 높은 지위, 즉 여사제 정도의 위치였을 가능성을 함축한다.
이는 삼손이 들릴라 전에 만났던 여자와 비교해 보면 들릴라의 위치가 더욱 선명해진다. 삼손은 팀나의 필리스티아 여자를 아내로 맞고자 아버지와 함께 그녀의 집에 가서 잔치를 베푼다(판관 14,10). 그러다가 그곳의 젊은이들에게 내기를 걸고 수수께끼를 내게 되는데(판관 14,12), 삼손이 낸 문제에 답을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한다. “네 신랑을 구슬러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풀이해 주라고 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너와 네 아버지 집안을 불태워 버릴 테다”(판관 14,15). 이런 강압적인 태도는 들릴라를 대하는 제후들의 모습과 확연히 차이 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유다 고대사』에서 팀나 여인은 ‘한 처녀’로 들릴라는 ‘창기’로 기록한 것을 들 수 있다. 성서에는 팀나 여인도 ‘여자 하나’, 들릴라도 ‘한 여자’로 표현했는데, 이는 들릴라의 신분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의심하게 만든다.
요컨대 팀나 여인이나 들릴라나 삼손의 이야기에서 서사 구조상 배역의 역할은 동일하나, 팀나 여인은 이름도 남지 않을 정도의 비중이고 들릴라는 본인의 이름으로 전승되는 인물이다. 더하여 팀나 여인을 대하는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태도와 들릴라를 대하는 필리스티아 제후들의 태도에서 이 둘이 신분상 차이가 있음을 추정하게 한다. 그래서 들릴라가 다곤 신을 숭배하는 신전 창녀 중 하나였으며 여사제 정도의 직급이었을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