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홀로서기

아난존 2020. 7. 30. 03:55

내 눈의 들보가 보이지 않으니 인간이다. 남의 눈에 티끌만 보이니 인간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진영논리만큼 진부하고 비루한 것도 없지만 진영논리만큼 안심되고 변치 않는 것도 드물다. 그래서 보통의 인간이라면 어느 곳이든 소속되고 싶고, 이왕 소속될 거라면 내가 잘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었음 한다. 안전에 대한 욕구가 죄는 아니니까.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하고 잘나야 하고 짓밟아야 하고, 육식의 세계에서 초식의 생명체들은 살아내기가 참 버겁다. 도란도란 그냥저냥 살자고 해도 인류는 그래 본 적이 없으니 그걸 꿈꾸지 못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라 상상도 할 수 없다. 더 많이 가져 봐야 의미 없는 세상, 재산과 지위가 인격이 아닌 사회, 그런 세계에서 살아본 적 없으니 그런 세계를 지향할 수 없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가능했을까? 그럴 리가, 인권이란 말이 신분제 사회에선 형용모순이니 애당초 가당치 않고, 그럼 수렵시대엔? 아서라, 생존이 유일한 목적인 사회에서 인권은 무슨 얼어 죽을, 생존 앞에 모두 무릎 꿇어! 그것만큼은 생물인 인간들이 양보 못 하는 불변의 진리 아닌가, 위험사회일수록 인권 찾기가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기에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 따위 태초부터 있었던 게 아니다. 그나마 사회가 덜 위험해졌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조건만으로 천부인권 운운하는 게 낯설지 않게 된 것일 뿐 여전히 인간을 생태계의 최강자로 인식하는 한 인권은 생존권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에 대해 공론화가 안 되는 이유,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인권이 곧 생존권이기 때문이다. 살아야 한다는 맹목적 관성들, 진영논리에 갇히기 쉬운 요즘 세태에서 어떤 진영도 선택하지 않으면 생태계의 가장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그런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그러니 두려워서라도 진영을 선택하고 한쪽 편을 들기 마련이다. 그게 학습된 공포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처럼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