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육면체의 세상과 불통의 바벨탑

아난존 2019. 12. 16. 12:39




 

대화는 참 어렵다, 뭐 대화란 게 원래 어려운 거니까 새삼스럽진 않지만, 대체 대화가 뭐길래 왜 그렇게 어려운 걸까, 다양성이 존중되는 현대사회라 그렇다고? 설마, 다양성 따위 우리 사회에서 인정된 적 있었나?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녀야 맘 편한 사람들이 주류라는 거,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알아, 그러니 다시 각 잡고 생각해 보면, 수직구조와 위계질서에 익숙한 사회에 강제적으로 유입된 수평적 관계, 그 수평이란 말이 너무 도발적으로 다가온다는 거, 그렇게 대화의 개념이 일방에서 쌍방으로 지향점이 움직이면서 그 낯섦이 공포로 변이되자 우리는 그냥 세대 간, 성별 간, 지역 간, 계층 간, 직업 간 등등의 단절을 택했고 불통을 받아들였다. 원래 산다는 게 그런 거야, 외롭게 홀로 가는 게 인생이야 그러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최소 3차원의 입체다. 이를 가장 단순화시키면 육면체의 세상, 그래서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육면체를 하나씩 가지게 되는데, 문제는 언어가 2차원 평면이란 것이다, 아니 어떤 사람은 1차원 직선이라,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바벨탑의 전설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 한국말이라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외국어와 차이도 없는데, 그래도 음성기호를 안다는 것 때문에 각자 자신의 육면체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니 이게 음성기호조차 못 알아듣는 외국어보다 못하다. 그렇게 오해가 증오를 만들고 착각이 혐오를 증폭한다.

 

간신히 육면체 밖으로 나와도 내가 너무 작아서 한 면밖에 못 보면 세상은 그냥 커다란 벽이 되고 만다. 내가 육면체보다 더 크거나 아니면 움직임이 자유롭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는 가능해야 불통의 원인을 고민이라도 해볼 수 있다. 그게 안 되면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고, 타인은 나를 괴롭히는 존재고, 내 말은 죽었다 깨도 상대에게 가 닿지 않는다. 이게 스릴러 아닌가, 영화 곡성이 제대로 공포 영화일 수 있었던 이유도 불신이 주는 불통의 모습이 비극으로 치닫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는 공포 영화의 소재도 기법도 무서워라 해서 못 봅니다만...ㅠㅠ;;;)

 

상대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는 세상에서 대화란 걸 해봐야 불신의 늪은 깊고도 아득하여 오해는 절대 이해로 치환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랴, 속인 사람보다 속은 사람을 더 질타하는, 피해자에게 가혹한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달한 기술인 걸, 행여 마음 주면 상처받을까 타인을 폄훼하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위장술인 걸,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더 멀어지며 자신의 육면체 속에서 점점 작아진다. 남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더 보이지 않게 꽁꽁 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