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젠휘틀의 ‘신’개념으로 본 세월호 참사 해석
하느님의 존재는 관념 안에서 형성되는가, 체험 속에서 만나는가, 그래서 하느님은 어떤 양식으로 실재하는가, 아니면 실재하지 않는가를 놓고 <하느님>의 저자인 하젠휘틀은 지나치다 싶게 사고를 전방위적으로 펼쳐 나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인들은 실증적인 근거 위에서 실존적으로 존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나와 무관한 하느님이 내게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는가? 또는 아무리 잘 차려진 밥상이라도 내가 먹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신관 앞에서, 내가 알지 못하나 신의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초인적인 신앙심은 맹목적인 애국심보다 억지스럽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 최대한 실증적으로 더불어 실존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접근하려다 보니 결론보다 과정이 난해한 진술들이 하젠휘틀에게 많을 수밖에 없다.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는 상태에서 다른 접점의 논리들을 흡수 통합하려다 보니 생긴 부자연스러운 흔적들, 같은 길을 올라갈 때 평가하고 다시 내려올 때 평가하면서 생기는 낯설지만 같은 풍경에 대한 다른 묘사들, 이런 반복과 변주의 궤적들은 하젠휘틀이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문의 프러포즈 같다.
이런 하젠휘틀이 규정한 여섯 가지 현대의 신관을 세월호 사태에 적용해 본 것이다.
1. 고통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기본 실재로서의 하느님
세월호 참사는 하느님의 계획과 무관한 자리에 있다. 희생자들이 어려서 죄가 없으니 천사로 쓰기 위해 데려간 것도 아니며, 우주의 배후자로서의 하느님이 더 나은 단계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려고 이 참사를 통해 숨겨진 의도를 드러낸 것도 아니다. 그저 불의의 사고는 불의의 사고일 뿐이며, 종교적 해석으로 의미 부여를 할 수 없는 무의미한 고통의 차원에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비통함은 방향성을 갖지 못하고 기도의 울림은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인간은 고통스러운 세계와 동일시되는 고통스러워하는 신과 만난다. 하느님은 고통을 받지 않는 존재, 즉 상처받지 않는 존재가 아니기에 인간은 신을 원망할 수 없다. 고통을 취사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취사 선택할 수 없고, 같은 맥락에서 하느님의 존재 역시 선택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저 주어진 세계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세계를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말없이 수용하는 상태에서 발현되는 긍정의 빛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와 동일한 하느님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깨달아야 한다.
2. 원초 신뢰 안의 하느님
세월호 참사가 국가적 비극이며 통탄스러운 인재(人災)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참담한 사건 속에서도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경험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게 된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은 채 다른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희생된 승무원, 교사, 학생, 승객들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하느님의 모상들이다. 물론 이들이 모두 신앙인들은 아니며, 무신론자라 해도 위기 시에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던질 수 있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와 별개로 모든 인간에게는 인간의 원초 근거로서의 신의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를 신과는 무관한 인간의 본성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이 경우 왜 의인의 수가 적은지 해명하기 어렵게 된다.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의 특성으로 선행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다수가 유사한 성질을 보여야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교육의 효과나 사회문화적 조건의 발현이라고 해도 이 역시 같은 질문, 그렇다면 왜 의인이 소수인지 의혹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기존 질서가 무너진 현장에서 드러나는 살신성인의 정신은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며 전적으로 개체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자기완성의 형태로서 인간 존재의 최종 도착지인 하느님의 모습이 실현된 것이다.
3. 인간의 미래로서의 하느님
세월호 참사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 이해되지 않는 슬픔으로 전 국민을 몰아넣었다. 과연 이 참사를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신앙인이라면 그것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신론자들은 이 세상의 고통을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므로 인재(人災)의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차원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겠으나, 신앙인들은 만사를 규정하는 실재인 하느님이 존재하기에 그렇게 간단히 보이는 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부조리를 인정한다면 무신론자들의 비판이 아니더라도 신의 불완전함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의지가 미래로부터 오는 것임을 간과한 판단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에 현 존재자들에게 하느님 이미지는 미완일 수밖에 없다. 물론 하느님은 이미 완성자로 존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지표로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를 하느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이런 도정의 역사가 인간 구원의 역사이며 자유 획득의 역사이다. 즉 미래의 하느님이 매 순간 현재화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인류의 역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의 고통에 주저앉아 머물러선 안 된다. 세월호 참사가 빚은 비극을 딛고 일어나 다시는 이런 사고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이라 믿는다.
4. 신비로서의 하느님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었다. 안전이 보장되는 평상시의 국가는 국민에게 하나의 관념으로서 존재한다. 이때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믿어진다. 이런 관념이 국가의 본질에 대한 사유라면 위기 시에 드러나는 국가의 모습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 즉 나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실존적 상황 속에서 존재한다. 이때 실존과 본질의 괴리가 클수록 본질적 의미는 무가치해진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를 통해 드러난 대한민국의 실체는 국민에게 실존적인 상처를 극대화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만큼 성숙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실체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를 비판하든 이민을 통해 새로운 국가와 다시 계약을 맺든 그것은 개인의 실존적 선택 문제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국민은 조문과 성금과 자기반성 등을 통해 그 슬픔을 나눠짐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즉 개인이라는 실존적 존재들이 국가의 본질에서 멀어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재정립하려고 일어선 것이다. 이는 드러나는 실체를 통해 그 본질을 감지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같은 양상이다. 하느님은 영이시기에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하느님을 인지하였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하느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직접 나타내시므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사소하고 하찮기 그지없는 우리 인간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경험하도록 가르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비극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져 하느님의 존재를 만방에 알리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세월호 희생자들 역시 안전하지 못한 우리 국민의 생명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자숙하고 각성하도록 요구하는 성찰의 대속제가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 귀하게 창조하신 생명들이 무책임하고 무능한 인간들의 잘못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곧 내가 죽을 수도 있었는데 그들이 죽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그들이 죽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5. 언어문제로서의 하느님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 국민에게 말씀하실 것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자신의 뜻을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각자가 다 하느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라도 하느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역사에 단지 동력으로만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억제하는 신앙생활은 무기력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행위이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적극적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자율적인 선택을 통해 나갈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당면한 문제에 절망하고 주저앉아 정지해 있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세월호 비극은 우리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지만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현실의 과오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정의로운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분투해야 한다.
6. 인간에 대한 진술로서의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 국민이 지금의 고통을 극복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지금 당장 이 고통의 의미를 알기는 어려우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유 없이 방치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항상,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간극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우리는 일상을 통해 매 순간 체험하기에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신앙인으로서 체험하는 성령의 충만함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며 선물이다. 이는 이웃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의 비극적인 고통이 전 국민의 문제는 아니라고 외면하면서, 해당 부처나 관련 당사자 간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태도는 이웃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란 교회의 소명을 저버리는 것으로, 우리 인간들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 하느님을 인간들 밖으로 추방해 버리는 반신앙적인 행위를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