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사람으로 험한 세상 살아가기
섬세하다는 것은 사유의 가닥이 많다는 것이다. 메뉴판에 메뉴가 많으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같은 메뉴라도 매운맛, 달콤한 맛, 짭짤한 맛이 있는 것처럼, 사유가 섬세하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생각의 종류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유부단하거나 답답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섬세한 사람들은 타자의 화법을 습득하는 데 익숙하다. 100개의 어휘를 가진 사람이 10개의 어휘를 가진 사람에게 맞추는 이유와 같다. 빨간색과 파란색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보라색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라색을 말하면 빨간색 또는 파란색으로 상대가 이해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안 만들고자 보라색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섬세한 사람들은 오해를 많이 받는다. 감정의 빛깔이 다양한 사람은 예민하다는 인상을 주기 쉽고, 지식의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은 관념적이란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A면 다 같은 A지, A+와 A-는 A가 아니냐는 지적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탕수육 하나를 먹을 때도 부먹이냐 찍먹이냐 기호가 나뉘는 마당에 A는 A-와도 다르고 A+와도 다르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공유된 가치의 전제 없이, 사고의 지류가 인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다르다와 틀리다는 틀리다일 뿐이다. 그러니 어쩌랴, 아는 만큼 상처받는 게 섬세한 사람들의 몫인 것을, 그러나 섬세함이란 선물이다. 세공이 정밀할수록 좋은 그릇 아닌가, 원하지 않았어도 공짜로 선물을 받은 이상 선물을 싸고 있는 포장지를 치우는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