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관계

이재명 사태 또는 이재명 신드롬

아난존 2018. 10. 31. 04:03




이재명은 왜 이 시대의 정치 아이콘이 됐을까?

이재명이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의미는 이제 그의 개인적 범주를 넘어 버렸다.

 

이재명은 소년공에서 변호사로, 다시 변호사에서 성남시장으로, 그리고 현재는 경기도지사로 진화하면서 끊임없이 이슈의 중심에 있다. 왜 하필 그일까?

 

부정부패가 심한 필리핀에서 범죄에 가차 없는 두테르테는 기득권과 달라 보였다.

상류층끼리 꽁냥꽁냥 사이 좋은 미국에서 위선을 걷어차 버린 트럼프는 기존 정치세력과 달라 보였다.

누구에게? 소외되고 힘들어서, 악으로 깡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에게.

그러니 막말하는 우리나라 자칭 보수 정치인들은 두테르테 흉내 내고 트럼프 따라 해봐야 진정성이 없다. 코스프레는 재미로 하는 취미활동일 뿐이다.

 

박근혜 최순실 사태에서 가장 먼저 탄핵을 꺼내든 정치인이 이재명이었다.

민주당 문재인이 여론을 살필 때, 정의당 심상정이 단계적 퇴진을 말할 때, 청계천에서 마이크를 잡고 촛불집회의 선봉에 섰던 이가 이재명이었다. 그때 그의 인기는 상한가였다.

 

그런데 우리의 시민의식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높았다. 비폭력 평화시위인 촛불집회를 매주 토요일마다 줄기차게 이어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시민들 숫자도 늘어갔다. 다행히 박원순이 서울시장이라 평화적 시위가 보장되었다. 세계가 놀란 만큼 우리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뒤돌아보면 참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많았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기적처럼 민주적 절차를 하나하나 다 밟아가며 박통이 탄핵되고 문통이 당선됐다. 기적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 순간들이었다.

 

우린 식민지를 거쳐 여전히 식민지 잔재가 창창한 기반 위에서 경제만 성장한 나라이다. 독재 아래 생존을 최우선가치로,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지배 아래 개인의 탐욕을 최선의 이념으로 권장 당하며, 그렇게 오직 경제만을 지상과제로 햄스터처럼 부지런히 앞만 보고 달려온 천박한 나라, 서구에서 보자면 듣보잡 후줄근한 나라, 그것도 전 세계가 양극화로 인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자타가 모두 놀랄만한 정치적 사건들이 일어나버린 것이다.

 

그러나 촛불이 요술봉은 아니다. 구석구석 켜켜이 쌓인 우리 안의 적폐와 싸우는 일은 온전히 우리 몫으로 남았다. 이 과정에서 이재명은 우리 사회의 다층적인 인식 수준과 복잡한 계급의식을 건드리는 뇌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이재명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정도의 집단 다구리는 너무 지나쳐, 나는 이재명에 관심 하나도 없었는데 이제는 관심을 갖게 됐어,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재명 사태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까?

그의 어린 시절과 가족사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반면, 그의 자수성가 스토리는 소외계층에게 희망이 된다. 그의 거친 태도와 악바리 근성은 어떤 이에게는 대리만족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비호감으로 다가온다. 그는 열렬한 지지자 아니면 극렬한 반대자를 몰고 다니는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해 버렸다.

 

그래서 이재명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억울한 사람이 많을수록, 적폐의 골이 깊을수록 이재명의 인기는 올라갈 것이다. 그만큼 화끈하게 기득권과 싸울 수 있는 전투력 갖춘 정치인이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재명을 인신공격하는 사람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을수록 이재명은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다. 동정심만큼 정치인에게 유리한 동력도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이재명은 우리 사회 시민의식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그의 개인사가 정치인으로서, 행정가로서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라면 여전히 우리 사회가 전근대적 사회라는 얘기다.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는, 즉 지위와 역할이 곧 신분인 봉건사회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재명은 우리 사회 적폐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오래된 몹쓸 관행들이 궁중비화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요즘, 그는 적폐 쪽과 적폐척결을 외치는 쪽 양편 모두를 베는 날카롭고 괴이한 검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를 둘러싼 적폐의 강에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다들 발을 담갔거나 담갔었거나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재명 행보와 그가 이끌 결과가, 그의 미래와 상관없이, 적어도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달라진 미래로 내딛게 하지 않을까 그렇게 위로해 본다. 그가 강감찬이 되든 논개가 되든, 이 시대를 상징하는 정치인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